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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인문정신/부엉이 울음소리

글에 대한 단상

 

 

 

무기력감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한다. 글 속에 녹아 들어서 다시금 이 삶에 뿌리를 내려야한다. 독서-글쓰기는 질문의 생산과 그 질문에 대한 자기 대답이다. 모든 글은 세계에 대한 궁금증의 표현이다. 

   

    책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저자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그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을 듣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 속에 녹아있는 작가의 질문을 다시금 내 의식을 가지고 추출해내고 응결해 내는 과정이다. 그래서 글이란 고정되어 있는 활자들이 아니라, 읽어내는 이의 역량이 결정하는 텍스트다. text와 test사이의 유사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독자의 역량에 따라 같은 글에서 서로 다른 수십가지의 질문을 이끌어 낼 수도 있고, 같은 질문에 이르러서도 수십가지의 서로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느냐'는 결국 그 추출된 질문 앞에서 어떤 공/반감의 경험을 가졌는가 하는 물음으로 변한다.

 

    아무것도 추출해 낼 수 없는 이에게는 독서 후에도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음이 당연하다. 순간적이고 즉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러한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부탁이다. 당장 나조차도 글 읽는 것이 이토록 힘든데, 그런 최소한의 꼼지락조차 없는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그 즉물성과 피상성, 그리고 혼미함이 바로 우리의 시대정신 이다. 수십가지 차원에서 밀려오는 삶의 물결, 그것의 어마어마함 앞에서 우리는 입을 닫고 생각을 멈추어 버린다. 내가 몸으로 느끼는 답답함은 내 안에 각인된 시대정신의 증상이다. 이 시대는 내게 쓸데없는 생각을 그치고, 그 시간에 나를 좀더 다듬어서 보다 나은 톱니바퀴가 될 것을 요구한다. 나 같은 중간계급의 아들들에게 시대는 속삭인다.

 

"생각하지 말고 노력하렴. 생각하지 말고 소비하렴. 그리하면 그것이 네게 만족과 안정을 선물해 줄꺼야. 그것이 바로 행복 아니겠니"

 

자본은 그것이 배제하고 있는 이들의 피와 눈물 위에서 밝게 웃고 있다. 그 달콤한 목소리와 매력적인 웃음을 통해야만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러한 세계에 저항하는 것이다. 궁금해하기-질문하기, 무엇이 문제-질문 일까 생각하기,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생각하기, 의심하지 말라고 해도 의심하기 를 통해, 불현듯 나는 스크린 앞에서 멍하게 침을 흘리면서 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영화는 무슨 내용 인지, 감독은 누구고 배우는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내가 언제, 어떻게 이 극장에 들어왔으며, 극장주인은 또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된다. 

 

    독서-글쓰기, 세계를 해석하는 연습은 매트릭스의 강제로부터 부분적으로나마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자, 획득된 자유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