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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 자료

<알음알음 찾아오는 소문난 독서모임/아시아경제/김수진/2013.02.25>

 

 

74세 書院지기와 고교생의 교감···알음알음 찾아오는 소문난 독서모임

최종수정 2013.02.25 14:56기사입력 2013.02.25 14:56

원문출처: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22514541106895&nvr=Y

 

사회문화부김수진

책을 지키는 사람들<7> ‘인문학 책방 길담서원 대표 박성준

[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21일 오후 서울 통인동 길담서원에 11명의 노원고등학교 학생들이 찾아왔다. 길담서원의 '서원지기 소년'인 박성준 대표가 일어나 학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방학중 독서활동으로 길담서원을 찾아왔어요. 요새 권장도서 선정기간이어서, 아이들에게 책을 직접 고를 수 있게 해 주려고 해요." 학생들을 인솔한 노원고등학교 한은경 선생님의 귀띔이다.

"길담서원에는 인문과 사회과학책 3500여권이 있어요. 몇발짝 안 되는 거리에 좋은 책들이 촘촘히 꽂혀 있지요. 피아노가 한 대 있어 음악회도 많이 열립니다." 길담서원을 간단히 소개한 박성준 대표가 아이들의 나이를 묻는다. "여러분은 언제 태어났어요?" "1996년이요." "저는 1940년에 태어났어요. 여러분의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지요?" 아이들이 놀란 얼굴로 숨죽여 웃는다. 낯설었던 분위기가 허물어진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아이들과 74세의 '소년' 박성준 대표 사이에 교감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아이들이 길담서원의 서가에서 고른 책을 함께 살펴보았다. 작가 김애란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주미 학생은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를 택했다. 무대연출가가 꿈인 문인경 학생은 자신의 몫으로 인문학자 김경집의 '마흔 이후, 이제야 알게 된 것들'을 꺼내들었다. "아직 18살이지만 마흔이 됐을 때를 미리 생각해보고 싶어요." '백석 시집'을 점찍은 학생, 철학책을 살펴보는 학생도 있었다.

'인문학 책방' 길담서원은 이제 5돌을 맞는다. 지난 2007년 박 대표는 책과 공간이 있으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길담서원을 열었다. "인문학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공간, 재미있고 즐겁고 누구나 평등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인문학이 '사망선고'를 받은 시대, 사람들은 놀랍게도 화답해왔다. 길담서원에서는 책읽기 모임인 '책여세'를 비롯해 프랑스어 공부 모임인 '끄세쥬'를 비롯해 '청소년인문학교실'등의 모임이 다채롭게 어우러진다. 전부 길담서원을 찾는 사람들의 자발적 움직임이었다. '특별한 공간' 길담서원을 직접 경험하려는 젊거나 어린 세대들의 발걸음도 꾸준하다. 이 날 방문한 노원고등학교 학생들도 길담서원이 그간의 결과를 모아 펴낸 '청소년인문학교실' 시리즈를 학교에서 읽고 토론을 나눈 친구들이다. "소문을 듣고 독서교육선생님들이나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이 온다"는 박 대표의 얘기다.

박 대표에게도 길담서원은 어떤 '답'이 됐다. 오랜시간 민주화와 반전평화운동을 펼쳐왔던 그는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길담서원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며 "이런 환경이 아니었다면 누릴 수 없는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돌이켰다. "길담서원을 열면서 철학공부를 시작했다"는 그는 지금 길담서원에서 2주일에 한번씩 자신이 직접 강사로 나서 철학강의를 하고 있기도 하다.

단순한 책방을 넘어 배움을 강조하는 이유는 박 대표 스스로의 '자성'도 깔려 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들고 있다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책을 어떻게 공부하느냐가 중요하다. 실은 학자도 교수도 정치인도, 제대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다." 길담서원은 그에게 "옛날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5년이었다"고 돌이키는 박 대표에게 길담서원의 미래를 물었다. 미소와 함께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길담서원의 존재가치를 고민중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어떤 조직이든 단체든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지 않다면 해체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만약 길담서원의 존재가치가 있다면, 5돌을 맞은 만큼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야 할 터다."

박 대표가 이 날 방문한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에는 이런 고민이 담겨 있었다. "제가 74살이잖아요. 길담서원을 떠날 걸 생각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길담서원뿐만 아니라 좀 더 먼 곳으로 떠나야겠죠. 그 때 난 마음 속에 내가 남겨두고 떠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나보다 훨씬 젊은, 나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길담에 남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있는 곳에 길담이 있을 겁니다."
김수진 기자 sj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