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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 자료

이야기 훔쳐오기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님'과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뭐 별거 아니긴 한데, 박민규님은 울산에 있는 나의 모교의 음악선생님의 동생이시다. 어느날, 음악선생님이 동생이 작간데 내일 TV에 나온다고 그랬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음악선생님 동생이 TV에 나오는 시간이 되어서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를 찾아봤다. <핑퐁>을 출간했을 즈음이었는데, 지금도 박민규님의 몇마디가 기억난다.

 

MC가 뭐라고 질문을 했는데, 박민규님는 지구상의 인간이 다 없어져야 한다는 식의 대답을 했다. 마치 지구를 오염시키는 지구인들을 제거하러 왔다는 어느 외계인처럼. 그러자 MC가 '그럼 작가님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라는 식의 질문을 다시 했는데,

 

박민규님의 대답은 "네" 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그 정도로 간결하고 임팩트 있었다)

그것은, 외계인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지구를 오염시키고 앉아 있는 지구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각이 담긴 실존적인 대답이다. 그 당시의 나는 그걸 보고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나 싶어서 그 이야기를 학교 친구들에게 여러번 우려먹었다. '음악 선생님 동생이 말이야...'

 

이 자리를 빌어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내 수준이 그거밖에 안 됬다.

삼미를 통해 박민규님을 다시 만나게 해준 내 인생에 감사한다.

 

삼미에도 진리가 있었지만 이 책에도 진리가 있다. 

명문의 일부를 손수 타자로 옮긴다. 그럴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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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한심해요. 뭐가? 저 경비만 해도 자기 구역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이 아저씨 왜 이러실까, 그런 게 눈에 훤히 보일텐데... 그래도 허구한 날 히죽 댈 수 있다는 게... 또 심심하면 음료수를 갖다 주곤 한다니까요. 어머, 고맙습니다 말은 하지만... 뭐, 실은 속으로 별꼴이 반쪽이야 하겠지만... 어제는 딱 한 모금 마시고 그 자리에 병을 두고 간 거에요. 나 참.

 

그런 얘길 할 떄마다 요한은 거품이 인 맥주처럼 부글부글 웃음을 뿜어냈었다. 이봐 아미고, 진정하라구 진정. 아저씨는 그저 이쁜이가 좋았을 뿐인 거잖아. 누구나 그런 거라고. 너도 나도... 세상의 모든 아미고들은 이쁜이들을 좋아하게끔 만들어졌다고. 아무리 그래도 빤히 보이잖아요, 한두 번도 아니고... 글쎄 그런거라니까, 지구 반대편의 여배우에 빠져 팬레터를 쓰는 게 아미고들의 운명이야. 이쁜 언니들 앞에선 어쩔 수 없다니까. 티브이에 나온 언니를 쫓아다니고, 함성을 지르지만 뭐 그 언니는 사랑해요 여러분... 하겠지만, 그 언니가 사랑할까? 아미고들이 아무리 히죽대고 음료수를 건넨다 해도... 그렇다고 어머 뭐 이런 것들이다, 별꼴이 반쪽이야 할 수 없는 거잖아? 뭐예요, 그건 너무 바보 같잖아요. 몰랐어?

 

모두 바보란 걸?

 

그래도 허구한 날 히죽댈 수 있는 게 아미고들이야. 그 언니를 생각하며 자위라도 하고, 찾아서 채널을 돌리고, 브로마이드라도 구해 책상 앞에 걸어두고... 아미고들은 그럴 수밖에 없어. 왜? 실은 가질 수 없는 거거든. 가질 수 없으니까 열광하는 거야. 세상의 걸들도 마찬가지야. 밥맛 경비가 건네는 음료수가... 도대체 고맙겠냐는 거지. 아무리 하녀라 해도, 어쩄거나 신데렐라가 왕궁에 가는 이유는 왕자님을 만나기 위한 거니까... 설사 시간이 지나고 꿈이 깨진다 해도 그 전까진 꿈을 꾸는 게 인간인 거야. 그래서 걸들도 열광을 하는 거야. 비명을 지르고 기절할 정도로 오빠를 외치고... 물론 오빠들도 고마워요, 또 여러분 사랑해요... 하겠지만 오빠들이 과연 걸들을 사랑할까? 마찬가지지. 실은 가질 수 없기 때문이야. 너와 나... 이런 아미고들과 걸들은 말이야... 그래서 좆밥이야. 세상의

 

좆밥들이지. 정말로 그런 오빠를 얻을 수 있는 언니들은 말이야, 또 그런 언니를 만날 수 있는 왕자들은 말이야... 서로에게 열광하지 않아. 왠지 알아? 시시하기 때문이지.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건 누구에게나 시시한 거니까. 뭐, 그래도 좋은 거야. 돈만 주면 뭐든 하겠다는 인간들이 널린 게 사실이고, 윙크 한 번 날려주면 페이를 지불할 인간들도 널린 게 사실이니까. 문제는 바로 아미고들과... 걸들이지. 가질 수 없는데도 허구한 날 히죽대는 거야, 만날 수 없어도 허구한 날 박수를 치고 와와 하는 거지. 어머 왜들 이러실까 소릴 들어도... 하는 거야, 해서

 

저들에게 유리한

 

세상을 만들어 주는 거지. 그래서 세상은 12시 종을 울리지 않아. 마법이 깨지는 순간 일곱 난장이와 신데렐라 모두를 잃게 되니까... 아니, 실은 울릴 필요도 없는 거겠지. 애당초 마법은 존재 하지 않았고, 아미고들도 걸들도... 이미 각성의 타이밍을 놓친 지 오래니까. 자, 호박을 마차로 바꿔줬어. 너에게도 이제 차가 생긴거야. 이런 어디서 이런 드레스가... 너 참 몰라보게 예뻐졌구나. 하지만 생각해 봐. 아미고인 너에게 차가 생겼다면 저들은 대체 얼마를 벌었을지... 걸인 네가 이 정도로 예뻐졌다면 저들은 대체 또 얼마나 예뻐졋을지... 그러니 내버려두라고, 설령 마법을 만든 게 저들이라 해도 그 마법을 유지하는 건 다 같은 좆밥들이야. 세상의 종은 실은 매일 울리고 있어. 아무도 듣지 않을 따름이지. 봐, 보라구! 백화점에 들어와 있으면 왕궁에라도 온 줄 아는 게 좆밥들이니까. 안 그래 아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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