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때 생물 선생님의 극성스러운 채근으로 친구들과 함께
학교 근처 개천 옆에서 여러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가끔
고향에 갔다가 그 근처를 지나면서 나는 이제 그것들이 키가 크고 그늘이 짙은
나무들이 되어있음을 보곤한다. 그 나무들을 보는
순간은 내게 순수한 기쁨의 시간이다. 그것은 그 나무들을 보면
내 소년시절이 회상되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나무들은
땅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우리의 존재의 근거를 환기키셔준다는
좀더 근원적인 맥락이 작용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그루의 큰 나무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체를 그 품에서 기르고 보살피지만,
사람에게는 어떤 다른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큰 배움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최초로 시적, 처락적 존재로서의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은
키큰 나무의 가지 끝에서 하늘을 지각하는 경험을 통해서 일 것이다. 미당 서정주는
젊은 날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의 바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에게 무의식 중의 큰 스승은 언제나 말없이 서 있는 나무들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한 나무들을 지키고, 섬기는 일보다 지금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자기주장을 위해서, 또는 자기표현이라는 그럴싸한 명분 밑에서 쉴새없이
나무들을 파괴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인간생존의 생물학적 사회적 기초 자체가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런 일도 엇다는 듯이 옛 습관을 되풀이하면서 행동하고
있는 것것이다. 8년 전 학교의 연구실에서 뛰쳐나와 팔자에도 없는 잡지를 엮어내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나 자신의 당혹감을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뛰어난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간이 산업기술문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집단자살체제를 만들어
놓고 오히려 그 체제를 즐긴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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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e Rodin(로댕) (0) | 2013.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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